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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해운대에 올라-이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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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롱불촌장 2016. 12. 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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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해운대에올라/이안눌/登海雲臺/고운최치원

해운대천년음각/해운대천년석각

 

 

해운대에 올라

 

이안눌

 

 

해운대에 올라

이안눌

 

구름속에 치솟는 듯

아스라이 대는 놉고

 

굽어 보는 동녁바다

티없이 맑고 맑다

 

바다와 하늘빛은

가없이 푸르른데

 

훻훨 나는 갈매기

 

등너머 타는 노을

 

해운대 천년 석각

(신라말의 대시인이자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 음각)

 

 

登海雲臺

 

石臺千尺勢凌雲

 

下瞰扶桑絶點氛

 

海色連天碧無際

 

白鷗飛去背斜熏

 

해운대 명명자인 崔 致遠을 생각하며 쓴 詩.

 

해운대 조선호텔-바닷가 송림쪽에 있다.

 

 

 

해운대에 올라

이안눌

 

구름속에 치솟는 듯

아스라이 대는 놉고

 

굽어 보는 동녁바다

티없이 맑고 맑다

 

바다와 하늘빛은

가없이 푸르른데

 

훻훨 나는 갈매기

 

등너머 타는 노을

 

 

이안눌(李安訥) 1571-1637(선조4-인조15),본관 덕수(德水).

자 자민(子敏), 호 동악(東岳), 시호 문혜(文惠)



()의 증손으로 진사 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필()에게 입양되었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18
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동년배인 권필(權鞸)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우를 맺었는데,

 

이러한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하였다.

29
세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
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에 나갔으며,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1607
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
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곧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된 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 사직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1627
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631
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근면한 관리를 뽑는 데 들게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1636
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환도한 뒤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특히 시작에 주력하여 문집에 4, 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번이나 읽었다고 하며, 시를 지을 때 일자일구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唐詩)에 능하여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 聞歌〉가 특히 절창이라 일컬어졌고,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 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난을 형상화시킨 장편시로서,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는 자신이 옮겨다닌 고장을 중심으로 묶여 있어서 그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으며,

특히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국난에 피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는 대명교섭사(對明交涉史)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澤堂集, 東岳集(驪江出版社 影印, 1985). 〈金鎭英〉

 

출처:엠파스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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