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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봅시다]진정한 우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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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롱불촌장 2019. 8. 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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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정 해상왕 장보고역 최수종 최무창역 이원종 둔촌동 둔촌 이집 영천 천곡 최원도 이당 광주 이씨 영천최씨 여종 제비♬


진정한 우정이란



1. 목숨을 내어줄만한 감동적인 우정

통일신라시대 군관 최무창과 해상왕 장보고의 우정


<드라마 해신>을 보면 통일신라의 군관 최무창(이원종 분)은 무술 제자 궁복(장보고/최수종 분)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준다.

정말로 감동적인 우정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2. 둔촌동 이집과 영천의 최원도의 우정



“고려 말에 광주고을의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 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고을 원님의 사위가 된 이당은 슬하에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그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 이집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 이집은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였다가 포살령을 받고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이집이 경상도 영천에 머물렀던 것은 영천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가 증명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최원도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낙향을 하여 영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이집에게 포살령이 떨어지자, 늙은 아버지 이당을 업고 영천까지 가서 최원도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4년 동안 숨어 살던 이집은 신돈이 죽은 후 다시 광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연로한 아버지 이당은 영천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묘역을 쓰게 되었다


2. 600년 이어오는 우정

이집(李集)선생과 최원도


광주(光州)를 본관으로 하는 광주이씨(光州李氏)의 증시조 이집(李集)은 이자성의 7세손인 당(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아전 계급이었던 광주이씨 가문을 일조에 혁신하였다.그런 중에서도,문장이 뛰어나고 절개가 높은 선비로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이집에 대한 옛 기록들을 요약해 보면,고려 충숙왕14년(1327)에 태어나 어릴 때의 이름은 원령(元齡)이고 호는 둔촌(遁村)이다.문경공안보(安輔)에게 글을 배웠으며,충목왕3년(134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당시 최원도는 이집과 과거 동기생으로 영천최씨이며,호는 천곡(泉谷)이다.

이집은 진작에 요승 신돈의 화를 피하여 그를 찾아왔다.이집은 개경의 용수산 아래 살면서 학문지절이 뛰어난 폭넓은 교유를 하고 있었는데,신돈의 독재를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이집은 무엇보다도 70이 가까운 아버지에게 미칠 화를 염려하여 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 산길을 태해가며 멀고도 험한 야행천리로 영천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이집 부자가 가까스로 영천에 당도한 그 날은 마침 최원도의 생일이 어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이집이 아버지를 바깥채 툇마루에 내려놓고 한숨 돌리는데 최원도가 나왔다.이리하여 둔촌과 천곡 두 친구는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천곡의 태도는 참으로 참으로 뜻밖이었다.반가와 할 줄만 알았던 천곡이 둔촌을 보자 크게 화를 내면서.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일이지 어찌 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소리치며 당장에 내모는 것이었다.물 한 그릇 달라는 청마저도 거절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곡은 둔촌이 떠나자 둔촌이 앉았던 바깥채 툇마루마저 뜯어내어 불태워 버렸다.잔치 손님들이 그 연유를 묻자 역적이 앉았던 자리는 태워야 된다고 대답했다.그러나 둔촌은 이런 박대를 받고 떠나면서도 천곡의 깊은 마음을 짐작했다.천곡의 박대가 진심이 아니라 포박령이 내려진 친구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그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한 것이다.생각이 이에 이르자 둔촌은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산 속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과연 천곡은 날이 어둡자 둔촌을 찾아 나섰다.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급히 둔촌이 간 쪽을 탐색하여 쉽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두지기 지우는 서로 끌어안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고,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천곡은 둔촌을 집으로 데려가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둔촌의 피신 생활은 시작되었고,그것이 4년간이나 계속되었다.둔촌부자를 다락방에 숨긴 뒤 천곡은 그것을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식욕이 왕성해졌다고 속여 밤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고 반찬도 많이 가져오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가 이 광경이 심부름하는 여종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큰일이었다.천곡은 당황하여 여종을 불렀다.그리고 만약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두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것을 간곡히 설명한 뒤 함구를 당부했다.

그러자 일의 중대성을 알게 된 여종은 상전을 안심시키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이 여종의 이름은 ‘제비’로 전해지고 있으며,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연아(燕娥=제비연예쁠아)로 되어있다.그 뒤 영천에 수색이 시작되어 신돈의 부하가 천곡의 집에 들이닥쳤으나 물 한 그릇도 주지 않고 둔촌을 내치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 등으로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또 큰일이 일어났다.둔촌이 영천으로 피한 그 다음 해인 공만왕18년(1369)에 아버지 당(唐)이 별세한 것이다. 아무 준비가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몰래 치러야 할 입장이어서 그 어려움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천곡은 자신의 수의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염빈을 하고 그의 어머니 묘 아래 장사지냈다.영천의 나현에 있는 세칭 ‘광주이씨 시조공묘’가 바로 그 묘인 것이다.이런 연유로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10월이 되면 나현에서는 양가가 같은 묘제를 지내고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를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그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충비 연아(제비)의 묘에도 양가가 모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이씨 대종회에서는 천곡의 모부인 묘에 상석을 기증하였고,1985년에 이를 다시 개수하는 등 양가의 우의가 오늘의 후손에게도 감동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 현종 10년(1669)에 사림에서 “둔촌의 학문과 지절은 삼은(三隱)과 함께 일컬을 만하다”하여 광주의 암사 강변(현재 서울 강동구 암사동 산1)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을 세웠으나 고종8년(1871)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그 터였음을 알리는 비석과 주춧돌만 남았고,강동구청에서 구암정(龜巖亭)정자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그리고 가까운 둔촌동은 둔촌의 호를 딴 지명인데,지금은 서울시로 편입되었지만 옛 광주 땅인 이 지역 일대가 광주이씨의 세거지로 둔촌동 이후에 크게 부각되었으며,자손들의 학문과 관계 진출이 또한 혁혁하여 광주이씨는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을 이루었다.


(참고한 글: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20>광주이씨, 2011.12.14 세계일보)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이씨(李氏) 중에서 네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씨족이다. 2000년 인구센서스 조사에 의하면 광주이씨는 4만8811가구 총 15만824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광주이씨는 고려 말에 광주지역에서 생원을 지낸 이당(李唐)을 시조로 삼고 있다. 이당은 고려 말 국자감(國子監)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는데, 그 아들들 5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크게 출세함으로써 조선조에 들어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된 인물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원래 광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라는 설이 있다. 그 후 광주이씨 일족은 신라가 망할 때까지 칠원(漆原·지금의 경남 함안)에 세거해 왔다. 하지만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토평되었다. 그 후 고려에서는 이들을 노비로 삼아 광주(廣州) 일원에서 살게 했다. 그렇게 광주 일원에서 노비로 살던 광주이씨 일족은 고려 말에 들어와 이당이 생원이 되고, 그 아들들이 크게 이름을 떨침으로써 가문이 급속히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를 본관으로 정한 것은 940년(태조 23)에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이자성으로부터의 세계도가 실전되어 고려 말부터 파악되고 있는 현조(顯祖)를 각각 일세조로 하여 족보를 수보(修譜)하게 되었다.

광주이씨의 분파를 보면, 둔촌(遁村) 이집(李集: 李元齡)을 1세조로 하는 둔촌공파(遁村公派), 이익비(李益庇)의 현손 이녹생(李祿生)을 중흥시조로 하는 율정공파(栗亭公派)의 이관의(李寬義), 이익강(李益康)을 중흥시조로 하는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양중(李養中)과 암탄공파(巖灘公派) 이양몽(李養蒙)이 있다. 그중 율형공파·석탄공파·암탄공파는 소수이고 둔촌공계가 대다수이므로 조선조에 광주이씨의 번영을 가져온 것도 둔촌공계라고 할 수 있다.

둔촌 이집의 영정. 이용훈 전 대법관, 이수성 전 총리 (왼쪽 사진부터)광주이씨의 연혁과 인물

광주이씨를 이야기할 때, 둔촌 이집과 그의 아버지 이당(李唐)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전엔 광주이씨 가문은 실제 존재했었는지조차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을 거론하기도 하고, 또 칠원(함안) 일원의 세거 호족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고려 태조 이후 천민계급으로 떨어져 아전(衙前)신분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역사적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갑자기 역사에 나타난 것이 고려 말이다. 둔촌 이집의 아버지인 이당이 국자감(國子監) 생원이 된 후 광주이씨 가문은 급속히 번창했다. 광주의 아전으로 있던 이당이 가문을 일으키게 된 과정은 설화로 전해 내려온다.

“고려 말에 광주고을의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 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고을 원님의 사위가 된 이당은 슬하에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그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 이집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 이집은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였다가 포살령을 받고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이집이 경상도 영천에 머물렀던 것은 영천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가 증명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최원도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낙향을 하여 영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이집에게 포살령이 떨어지자, 늙은 아버지 이당을 업고 영천까지 가서 최원도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4년 동안 숨어 살던 이집은 신돈이 죽은 후 다시 광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연로한 아버지 이당은 영천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묘역을 쓰게 되었다.

이집의 세 아들은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큰아들인 이지직(李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고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둘째 이지강(李之剛)은 좌참찬을, 셋째 이지유(李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또 이지직의 아들 이장손(李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이인손(李仁孫)은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이예손(李禮孫)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중 이인손의 다섯 아들이 조정에 중용되었는데, 큰아들 이극배는 영의정과 광릉부원군에, 둘째 이극감은 형조판서 광성군에, 셋째 이극중은 광천군에, 넷째 이극돈은 이조판서 광원군에, 다섯째 이극균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조선 성종 조에는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가 되었다. 팔극조정이라 함은 극(克)자를 쓰고 있는 광주이씨 문중의 8명이 영의정을 비롯해 각종 판서와 중요 직책을 역임하며 조정의 대소사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그럼으로써 광주이씨는 조선 초기 제일가는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번성했던 광주이씨는 갑자사화 등 각종 사화에 연루됨으로써 일족 30여명이 몰살을 당하는 멸문의 화를 당하기도 했다. 이극감의 아들 이세좌와 손자 4명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하지만 훈구파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 등 명문사림과 유대를 돈독히 하고, 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가문이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조선조 광주이씨는 명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침을 겪어야 했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선조 때에 광주이씨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이 된 그는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이휘소 박사, 이승엽 선수, 탤런트 이순재 (왼쪽 사진부터)광주이씨의 인물

◆둔촌 이집=둔촌 이집은 효를 실천해 귀감이 된 인물로 유명하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는 남한산성의 ‘국청사 우물’ 이야기와 과거 동기인 최원도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의 아버지 이당이 종기(등창)를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이집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서 “목욕재계하고 국청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면,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이집은 백일 동안 기도를 드리고 국청사에서 돌아오는 길의 바위 틈에 흐르는 샘으로 아버지 상처 부위를 닦아내니 상처가 나았다고 한다. 그 후 소문이 널리 퍼져 피부병 환자가 몰려왔고, 사람들은 그 샘물을 ‘국청사 우물’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이집은 1347년(충목왕 3)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합포종사(合浦從事)를 지냈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을 논박하다가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늙은 아버지를 업고 친구인 최원도가 있는 영천으로 도피하였다. 은거생활 4년이 된 이듬해 둔촌의 아버지 이당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최원도는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묘 자리에 예장하였다. 영천의 나현에 세칭 ‘광주이씨 시조공 묘’가 바로 이 묘인 것이다. 이런 연후로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월10일이 되면 영천에서는 양가가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고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정몽주·이숭인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그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혁혁한 훈구세력으로 등장함으로써, 그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1669년(현종 10년)에 여러 사람들이 그 유덕을 추모하여 광주 암사 강상에 서원을 세우고, 1697년(숙종 23년)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이란 사액을 받아 이곳에 제향(祭享)되었다. 이 서원은 현재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조선조에서 명신으로 이름 높았던 한음 이덕형.◆한음 이덕형=한음 이덕형은 1561년 외가인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이민성(李民聖)이다. 대사간이자 동인에 속한 이산해(李山海)의 딸과 혼인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결혼을 주선한 이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다. 나중에 부인 한산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1580년(선조 1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이이(李珥)에게 발탁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91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했다. 조선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오른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1593년 선조는 이덕형의 공을 인정하여 병조판서에 임명하였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가 되고 조선의 군사편제를 새롭게 만든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에 임명하였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북인(대북파)과 대립하였고, 결국 모든 관직이 삭직되고 낙향하여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가 경기도 광주 사저에 머물던 중 병을 얻어 1613년 사망했다.

절친한 사이로 잘 알려진 이항복(李恒福)과는 기발한 장난과 우정이 얽힌 많은 일화를 남겼고 1613년 사망했을 때 이항복이 가장 슬퍼하며 이덕형을 직접 염을 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근대에 들어와 일제시대에는 독립군으로 활약 중 체포되어 순국한 이수택(李壽澤)이 있으며 을사조약 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직한 이백래(李白來)가 있다. 또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종훈(李鍾勳)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인 이휘소 박사가 있으며, 이용훈 대법원장, 이수성 전 총리, 이중재 전 의원과 그의 아들 이종구 의원, 이경재 국회의원, 이주영 국회의원 등이 있으며, 이명재 전 검찰총장, 이택순 전 경찰청장도 광주이씨 가문이다. 또 우리나라 여성계의 태두인 이태영 박사를 비롯하여 탤런트 이순재, 야구선수 이승엽도 광주이씨 집안이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출처] 최원도(崔元道)와 이집(李集)의 이단금지교(利斷金之交) 1|작성자 강암


최원도는 영천(永川)사람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유진(有珍)의 아들로 영천 천곡(泉谷)에 살아서 아호를 천곡이라 하였다. 천곡은 여말(麗末)에 불교가 극성해서 사회가 극도로 문란해지자 불교를 배척하며

“불교에서 설(說)하는 말이 옳은 것 같아도 그렇지 않고 그 교가 아비도 임금도 없으니 후일에 윤기(倫氣)를 상하게 하여 나라를 어지럽힐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선비 된 자가 가까이할 바가 아니다.”

하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예를 갖추어 사제지의[師弟之誼:]를 맺었다. 성현의 학문과 세상에 들고나는 이치와 절차를 듣자 곧바로 깨달으니 목은선생이 선비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외우[畏友:]로 대접하였다.

충목왕 3년(1347년)에 벼슬길에 나아가 공민왕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이때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왕의 총애만 믿고 국정을 천단[擅斷:] 발호[跋扈:]하여 상하기강은 물론 임금의 존엄마저 무너뜨림을 보고 분연히 소를 올려 다투고 바른 말로 꾸짖었으나 끝내 효험이 없자 대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숨어 살면서도 임금을 사모하는 정성은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고려조가 멸망함에 이르러서는 천곡은 연로하여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초야에 몸과 이름을 함께 감추었으나 조선조 이성계 태조가 그의 어짐을 듣고 세 번이나 전직 좌간의대부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천곡은 개연히 탄식하며

“망한 전조(前朝)의 훌륭한 인물의 기림을 나는 부끄러워하며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청고(淸高)한 절개를 사모한다.”

하고 마침내 문을 닫고 시(詩)와 술로 여생을 마쳤다.

앞에 서술한 것은 천곡 최원도의 생애를 약술한 것이고 천곡이 고향 영천에 은거하는 동안에 생긴 친구간의 두터운 우정에 대한 미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둔촌 이집(遁村 李集)은 광주(廣州)사람으로 천곡과 목은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절친한 친구의 사이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벼슬길에 나아가 조정에 출사(出仕)하고 있었다. 둔촌은 천성이 깔끔하고 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요승 신돈이 왕의 총애를 핑계 삼아 국정을 문란하게 하고 갖은 행악을 자행하고 있어 원로대신들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신돈의 배척운동이 암암리에 확산되어 가고 있었는데 신돈의 문객 중에 둔촌과 동향인인 채판서(蔡判書)란 자가 있어 신돈의 위세를 업고 불의를 자행하므로 꾸짖어 물리치고 아울러 신돈의 흉측한 실상과 전횡(專橫)을 나무랐더니 채판서가 신돈에게 고자질하여 그의 격노를 사게 되었다. 신돈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은 곧 멸문의 화를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위급해진 둔촌은 늙으신 아버지를 등에 업고 야음(夜陰)을 틈타 화를 피해서 남행길을 재촉하였다. 둔촌은 영천 땅에 살고 있는 동년생의 지기(同年生의 知己) 최 사간[司諫:]에게 의탁하면 그래도 살 길이 생길 것이라 생각하고 낮에는 산 속에 숨고 밤에는 산길을 택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늙으신 아버지를 등에 업은 야행천리의 도망 길은 멀고도 험난하기만 하였다.

몇 달 만에 도착한 천곡의 집에서는 그의 생일날이라 많은 인근의 주민들이 모여 주연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고 있었다. 이 때 소식을 들은 천곡이 나왔다. 그토록 믿고 찾아간 구세주 같은 천곡과의 상봉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반기기는커녕 대노하여 소리치기를

“역적이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싣고 오지는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하면서 내모는 것이었다.

뜻밖의 사태가 전개되자 둔촌은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말하였다.

“나는 한모금의 물을 청할 뿐이지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걱정 말게”하지만 천곡은 물 한 모금 청하는 것조차 거절하고는 마구 내몰았다. 이렇게 되자 둔촌은 다시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정처 없이 그 집 마루를 떠났다.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둔촌이 앉았다 떠난 바깥 툇마루에다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하객들이 그 연유를 물으니

“역적이 앉았다간 자리는 태워버려야 한다.”

는 것이었다. 한편 둔촌은 천곡 댁에서 쫓겨나 산길을 택해 걸으면서 천곡이 한 일련의 행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곡이 진심으로 자기를 내쫓은 것이 아니라 체포령이 내린 자기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이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천곡은 생일 하객과 헤어지면 반드시 자기를 찾아올 것이라 굳게 믿고 싶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둔촌은 멀리 가지 않고 길 옆 덤불 밑에서 밤을 맞기로 하였다.

한편 천곡은 그 나름으로 생각하기를 둔촌은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었으니 분명코 멀리 가지는 못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등불을 들고 산길을 더듬어 둔촌이 간 방향을 따라 둔촌을 부르며 찾아 나섰다. 진정한 마음의 벗이요. 서로를 잘 아는 친구였다. 둔촌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다시 만난 천곡과 둔촌은 서로 끌어안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밤이 깊은 후에 아무도 모르게 둔촌 부자를 사랑채 다락방에 숨겼다. 하늘과 땅, 세 사람이 알 뿐 가족도 일체 모르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장 4년간에 걸친 다락방 피화생활[避禍生活:]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때가 공민왕 17년(1368년)의 일이었다.

둔촌부자는 낮에는 날마다 다락 속에서 남의 눈을 피하고 밤이면 방으로 내려와 한 이부자리 속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매끼의 식사가 큰 문제였다.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그 또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천곡은 밥 짓는 종아이 제비(漢字名은 燕娥(연아))에게

“요즘 내가 허기진 것처럼 식욕이 왕성해져서 종전의 식사량으로는 체력 유지가 되지 않으니 밥도 사발에 고봉으로 담아주고 반찬도 많이 담아서 달라.”

고 일렀다. 제비는 나리께서 식사량이 늘어서 그런 줄 알고 그대로 시행하였다. 매끼마다 그 많은 밥과 반찬이 거의 다 비다시피 해서 상이 나오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비는 마음속으로 잔뜩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밥상을 사랑방에 갖다 올리고 밖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도로 들어와서 문 옆에 숨어서 문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뚫고 주인 나리의 식사 광경을 엿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밥사발의 고봉 부분만 자시고 상을 다락방으로 올려주는 것이 아닌가. 제비는 깜짝 놀랐다. ‘아마도 주인 나리께서 요즘 바람이 나셔서 예쁜 새아씨를 다락방에 감추어두고 안방마님 몰래 재미를 보면서 식사를 나누어 자시는 것이로구나.’하고 추측하였다. 이런 일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닐 성 싶었다. 어차피 안방마님께서 아셔야 할 일이지 무작정 비밀에 붙여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마님께서 먼저 아시는 날에는 더 큰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제비는 안방마님께 이 사실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안방마님께서 대노하여 서방님에게 「안방으로 들어와 달라.」는 전갈을 사랑방에 보냈다. 부부싸움이 대판으로 벌어질 폭풍전야와 같은 분위기였다. 천곡도 부인에게까지 이 중대사를 끝내 비밀로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에 발각이 되는 날에는 양가 모두가 멸문의 화[滅門之禍:]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천곡은 할 수 없이 부인에게 전후사정을 털어놓았다.

“바람이 나서 새아씨를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고 둔촌부자가 신돈의 화를 피해서 우리 집에 와 숨어 있는 것이니라.”

고 양해를 구하는 한편 가족과 노비 등속에(단속과 이 일에) 대한 철저한 함구[緘口:]를 당부하였다. 안방마님이야 두 집의 가운이 달린 일이니 철저히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전 가족이나 노비들에게까지 함구령을 내린다 해서 과연 비밀이 보장될 것인가? 그러나 그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안방마님은 집안사람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가족들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조심하였다. 제비는 식사를 제공하는 처지라 마음의 갈등이 더 심했다. 만약 남과의 대화에서 자칫 실수하여 약간의 단서가 되는 말이라도 흘러나오는 날에는 양가가 멸문의 화를 입을 터이니 철저히 함구하라는 주인 나리의 엄명에 일상의 언어생활에 주눅이 들었으며 비밀의 보안유지가 잘 안 될까 항상 전전긍긍하고 강박관념에 가슴이 짓눌렸다. 제비에게는 좋아하는 총각 종아이가 있었는데 근래에 와서 제비가 말수가 적어지고 무엇인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총각 녀석은 주인 나리가 너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듯이 만날 때마다 추궁이 심하여졌다. 그녀는 우선 다른 말로 피하고 우물거렸지만 확연히 이해가 될 만한 답변은 못하였다. 그러자 점점 더 심각하게 따져드는 것이었다. 제비는 이러다가는 자기 입에서 이상한 말 한마디만 흘러나온다면 두 집안이 동시에 멸망한다는 압박감이 머리에 스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결국 자결하였다. 그녀는 진실로 두 집을 살린 희대[稀代:]의 충비[忠婢:]였다.


3. 나이에 관계없이, 남녀를 떠나서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진정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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