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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인왕산/병풍바위/치마바위/연산군

중종/단경왕후/겸재정선/인왕제색도/

사천이병연/이건창/위마행/모화관

박원종/성희안/유순정♬

 

 

인왕산의 병풍바위

치마바위 이야기

 

*방문일자: 2015년 11월 14일(토)

*방문인원: 친구 10명

 

 

 

치마바위

 

서울 종로구 옥인동

 

 

비오는 날의 치마바위-2015.11.14

 

 

비오는 날의 치마바위-2015.11.14

 

비오는 날의 치마바위-2015.11.14

 

[치마바위 이야기]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사직공원 서쪽에 있는

넓고 평평하게 생긴 바위로,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즉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중종이 되자,

그 부인 신씨(愼氏)는 친정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 때 피살되었는데,

반정을 주도해온 박원종 등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하며 반대하자

인왕산 아래 사직골 옛 거처로 쫒겨나 살게 되었습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습니다.

또 중종이 사직단에 나올 때에는 언제나

말죽을 쑤어 주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옥인동에 있는 인왕산 중턱 병풍바위 옆에

우뚝 솟은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답니다.

 

  (단경왕후 1487~1557)

 

조선 제 11대 중종의 비.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반정추진파에 의해서 살해당하였고, 페위 되었으며

영조 때 복위되었습니다.

성은 신씨, 본관 거창, 익창부원군 수근의 딸입니다.

1499년(연산군5) 중종이 진성대군으로 있을 때

그와 결혼하여 부부인에 책봉되었습니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떄문에

성희안 등의 번정추진파에 의해서 살해당했으므로,

역적의 딸이라 하여 단경왕후도 폐위되었습니다.

중종은 왕후를 폐위할 생각이 없었으나 당시의 형편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왕후에게는 소생도 없었으며,

폐위된 후에는 본가로 쫒겨났습니다.

1739년(영조15) 다시 왕후로 복위 되었습니다.

능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온릉(溫陵)입니다.

 

[중종 中宗 1488~1544]

 

조선 제 11대왕.제위 1506_1544년

가족관계: 왕비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아버지 성종, 어머니 정현왕후

 

자는 낙천, 휘 역이다. 성종의 2남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입니다.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 비는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 제1계비는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 제2계비는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입니다.

 

 

[이건창의 위마행 行]

*喂:두려울 위, 부르는 소리 외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의 세력들은 대비의 교시를받고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조선11대 중종왕입니다.

같은날 중전이된 신비13세 에 가레를올린지 8년만에

반정에 의해 국모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후일 자신들에게 보복을 두려운 반정공신들은

신비를 역적 죄인의 딸이다 모략하여 쫒아내려 하였습니다.

중종은 조강지처를 그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공신들의 핍박을 물리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폐위시켜 대궐에서 내보내고 말았습니다.

 

신비는 도성 밖 서편에 거처를 정해 살았으며,

중종은 애틋한 정을 전할 길이 없어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모화관>으로 갈 때면

자신이 타고 온 말을 대신 보냈으며,

신비는 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싸래기 죽을 쑤어

말에게 먹이며 무언의 교감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애틋하고 처절한 심경을

구한말 삼대문장가중 한 분인 영재(寧齊) 李建昌 선생이

1886년에 훼절한 사대부의 모습과 혼란한 조정에 대한

근심을 한 여인의 형상을 빌어 창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건창이 지은 5언 138구 680자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입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이른바, 중종반정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지어진

작품입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한

1506년 당시, 파직되어 한거 중이던

전 이조 참판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이

연산군의 폐출을 밀약하고,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의 호응을 얻어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을 말합니다.

 

1 단락

 

君王送汝來

임금께서 너를 보내셨으니

汝知君王事

군왕의 일들은 너는 알리라

君今幸何處

임금께선 지금 어딜 가신다더냐

玉體得無憊

옥체는 탈 없이 편안하신지

昔在晋山邸

예전에 왕자로 진산저에 계실젠

與汝同苦辛

너와 내가 같이 고생했었다

 

馬性固戀主

말의 성질 본디 주인을 그리거니

女命惟仰人

여자의 운명 오직 남편을 따를 뿐

況時遘艱日

하물며 반정이 일어나던 그 날에는

骨肉恣淫虐

왕족들을 멋대로 학살했기에

常恐罹禍網

언제나 재앙의 그물에 걸려들어

與汝失所托

너와 나 의탁할 곳 잃을까 두려워했지

 

一朝兵圍門

어느 날 병사들이 대문 에워싸

倉皇震內外

다급함이 안팍을 진동 했었네

吉凶判呼吸

죽느 사느냐가 순간에 달렸기로

氣色覘嚮背

기색을 살펴보아 향배를 가늠했지

人心雖不測

사람마음 비록 헤아릴 수 없다지만

馬尾皆當門

말 꼬리가 대문에 닿아 있었네.

 

是乃匪我寇

이를 보고 적이 아님을 알고서

賀君保無危

님에게 무사함을 하례올렸지

斯須大將入

조금 있자 대장이 들어오더니

拜跪前致辭

무릅 꿇고 절하며 말을 올렸지

君當作君王

진산군께옵서 임금이 되셔야 하니

獻壽千萬年

천년만년 축수를 올리옵니다.

 

君王騎馬出

군왕께서 말을 타고 나가시더니

出門卽登天

문 나서자 곧 바로 보위에 오르셨네

 

2 단락

 

昔視汝爲馬

예전 너를 볼적에는 말이더니만

今視汝爲龍

지금 보니 너는 용이 되었네

汝馬且爲龍

말이던 너 또한 용이 되었거니

爲妃何況儂

아내인 나인들 어찌 그대로 있으리

何人無夫婦

세상 어떤 사람인 부부 없겠으며

夫婦誰不憐

부부라면 누군들 사랑하지 않으랴

 

秀才作一郡

시골선비 한 고을의 원만 되어도

貧妻大使錢

그 아내 돈 쓰기를 물 쓰듯 한다는데

巍巍一國母

거룩하고 높으신 한 나라의 어머니

嚴嚴當壺闈

존엄하고 존엄한 중전 되었네

椒塗新掃灑

산초로 중궁전 새 단장하고

+兪雀被裳衣

궝 깃으로 장식한 옷을 입었네

 

何人敢誰何

뉘라서 감히 내게 무어라 하며

何事不稱意

무슨일인들 내 뜻대로 되지 않을까.

何意事大謬

그런데 어이해 일이 크게 뒤틀려

福與禍相倚

복과 화가 나란히 닥쳐왔는가.

王母種瑤桃

서왕모가 천상에 복숭아를 심어

千年一花開

천년만에 꽃이 한 번 피어났는데.

 

花開忽風吹

꽃 피자 어데선가 바람 불어와

零落隨飛埃

어지러이 떨어져 티끌 함께 흩날린네.

娟娟三五夜

너무도 아름다운 십오야 밝은 달이

滄海出明月

푸른동해 헤치고 떠올랐건만.

月出不上天

달은떠서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墮作塵中物

땅위로 떨어져서 티글 속에 묻히었네

 

3 단락

 

父親亂兵死

아버지 오라버니 반군 손에 돌아가시고

親戚悉誅夷

일가친척 모두 다 죽임당했네.

不知有何罪

무슨 죄인지도 알지 못하고

罪者云是誰

죄 준 사람 누군지도 알지 못하네

君王亦不知

임금또한 이 이유를 아시지 못해

但道爲三勳

다만 세공신이란 말만 하셨네

 

三勳彼何人

세공신 저자들은 어떤 자들이관대

立君不畏君

임금을 세워 놓고 두려워할 줄 모를까

殺我無罪父

죄없는 내 아비를 죽여 놓고는

謂我罪人女

날더러 죄인의 딸이라고 하고

罪人女當閉

죄인의 딸이니 폐위해야 마땅하고

罪人女當去

죄인의 딸이니 쫓아내야 한다하네

 

君王不能答

임금께선 능히 대답도 못하시고

但道糟糠妻

조강지처 어찌하나 그 말만 하시었지.

三勳告君王

세공신 임금께 고하는 말이

大義不可

대의는 사사로움에 끌려선 안됩니다

有臣當無妻

신하를 따르자니 아내를 버려야 하고

有妻當無臣

아내를 따르자니 신하를 버려야 하네

 

無臣君何爲

신하가 없게 되면 왕 노릇 어이 하리

何所無婦人

지어미야 어데 선들 얻는게 아니던가

君王無奈何

임금께선 어찌하실 도리가 없어

含淚與我訣

눈물을 머금꼬 이별 하시었지

生亦不同室

살아서도 한 방에 모시지 못하거늘

死亦不同穴

죽어선들 무덤을 같이할 수 있으랴.

 

千秋萬歲事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난대도

與君長離別

님과는 다시는 만날길 없네

咽咽禁城淚

은 대궐은 눈물로 목이 메었고

慘慘宮墻月

대궐 담엔 달빛마저 비통하게 비치었지.

步出建春門

걸어서 건춘문을 나서려는데

門外路曲折

문밖으로 꾸불꾸불 길이 나 있네

 

舊婢泣隨轎

부리던 계집종만 울며 따르니

殘燈耿耿滅

희미한 등불도 꺼질 듯 흔들렸네

去婦亦有歸

쫓겨난 여인네도 돌아갈 곳은 있는데

我歸無所親

이내 몸은 돌아갈 친정도 없네

亦有遺兒女

남겨놓은 자녀라도 남은 있는데

我今獨一身

이내 몸은 홀홀 단신 나뿐 이라네

 

郭西數椽屋

도성 서쪽 초라한 두세칸 움집

風雨無障蔽

찬바람 궂은비도 못 가린 다 네

涔涔向壁臥

눈물을 흘리면서 벽 향해 누웠으니

寂寂門長閉

대문은 쓸쓸하게 잠겨 있었네

我帷

갈거미 내 침상서 거미줄 치고

蟋蟀織我牀

귀뚜라미 내 침상서 뀌뚤 거리네

 

露草迷幽逕

이슬맞은 잡초는 길을 덮었고

風葉響空廊

바람 입새 소리만 빈 집 울렸지

憂思結夢寢

시름겨운 생각만 꿈길 따라와

時與君王見

이따금 임금을 뵙기는 해도

但夢晋山邸

꿈속에선 진산저만 보여지고

不夢交泰殿

교태전의 일들은 모이질 않네

 

那將九日貴

아흐레 누리다 만 부귀영화 때문에

斷此百年恩

어찌하여 백년 은혜 끊는단 말인가

君恩何曾斷

임금이 은혜를 끊을 것이랴

薄命自結寃

기박한 내 운명에 원한 맺혔지

潭潭將相宅

으리할사 웅장한 장상의 저택

對起長安道

장안의 큰 길 가에 마주 서 있네

 

中堂錦繡叢

안방 대청마루에는 비단이 가득

暎華

나라서 내린 예복과 첩지

휘황하게 비추이네

昨日書生妾

어제 한낱 서생의처가

一品夫人爵

정일품의 작호 받았네.

始知君王貴

알겠노라 임금이 존귀타 해도

不及功臣樂

공신의 즐거움엔 미치지 못함을.

 

4 단락

 

今朝聞鼓吹

오늘아침 북소리 들려오길래

遙知君王過

임금께서 지나가심 알게 되었지

君王不忘舊

임금께서 예전 정을 안 잊으시고

送汝來見我

 보내어 나를 찾아보게 하셨네

腸數三聲

애간장을 끊는 듯한 두세 소리에

助我同惻愴

이 맘엔 슬픔이 북받쳤다오

 

見汝月+几肉豊

네 기름진 살집을 바라다 보니

愛汝毛骨長

모골이 숙자란 것 보기 좋았다.

煜煜黃金

햇빛 받아 반짝이는 황금 굴레에

爛爛綠錦障

푸른 비단 말다래도 찬연했었다.

猩紅毾㲪

진홍의 담요가 그 위에 얹혔으니

是君常坐處

임금께서 늘 앉으신 자리일레라.

 

長歎復長歎

긴 탄식 내쉬다가 다시 탄식해 보네

人生不如汝

이내인생 너만도 못하구나

寒廚無所有

찬 부엌엔 아무것도 있는게 없어

煮糜持作粥

싸라기를 삶아서 죽을 쑤었지

濕薪吹殘火

젖은 섭 남은 불씨 호호 부나니

粥久不能熟

오래되도 그 죽은 익지를 않네.

 

玉手奉瓦盆

옥수로 동이를 받들고와서

低首當馬前

머리 숙여 말 앞에 건네는 말이

馬乎此粥

말아 이죽을 맛있게 먹고

努力奉至尊

노력하여 지존을 받들어 다오

此粥雖無味

이죽이 비록 맛은 없어도

此意愼無忘

이 마음은 부디 잊지 말지라

 

勿忘粥人

더욱이 이죽을 끓여 준 이가

曾爲君作羹

임금 위해 국 끓이던

사람임을 기억해다오.

 

馬行〉을 살펴보면

첫째 中宗反正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反正首謨者들의 推戴

寶位에 오르는 晉城大君의 역사적 사실과

앞으로 장차 진행될 사건을

예고와 동시에 愼氏의 불운한 운명을 암시를 하였고,

 

둘째로는 廢妃愼氏의 뒤바뀐 운명 즉

晉城大君이 보위에 오르는 과정과

자신의 心境變化와 짧았던 中殿時節

悔恨에 찬 심정을 읊조렸으며,

 

셋째는 反正當日 愼氏父親과 오라버니,

三寸의 이유없는 죽음과

一家親戚들의 귀양가게 됨을 표현과

불의한 反正 三功臣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임금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무뢰한 신하로 지적하고 있으며,

씨가 불의한 공신들의 모략으로 역적 죄인의 딸로

 누명을 입게 되었음을 시사하였으며,

부당한 신하들의 협박에 어쩔 수 없는 임금이

자신의 조강지처와 눈물을 머금고 이별하는 장면과

살아서 다하지 못한 사랑을 죽어서나마 이루어지길 원하는

깊고도 절실한 씨의 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도련 교수 논문 참조)

 

[ 영재() 이건창(昌) 1852(철종3)~1898]

 

조선말기의 문신, 학자, 대문장가

한성부소윤, 안핵사, 승지를 지냄

할아버지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서 살았습니다.

관직에 있으며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는데

은퇴 후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서 <명미당집><당의통략>

 

[ 모화관

 

서대문구 영천동 65번지 자리.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곳입니다.

<궁궐지>에는 태종 8년에 개경의 영빈관을 본따

모화루를 건립하였고, 세종 12년에 확장, 개수하여

모화관이라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모화관은 건양 원년(1896)에 서재필 등이 독립문을

세우면서 이 관의 이름을 독립관이라 개칭하고

독립협회에서 이 곳을 사용하면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습니다.

 

 

 

영화 <치마바위> 이야기

 

1964년 개봉된 영화로서

감독은 전응주

주연은 김진규, 최은희, 한은진입니다.

줄거리는 폭군 연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신왕으로 추대한 반정공신들은

왕비 신씨마저 페위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신씨는 매일같이 대궐이

굽어보이는 산에 올라 다홍치마를 둘러 쓰고

신왕에게 문안을 드리는데,

어느날 우연히 이를 발견한 신왕은

페비 신씨의 억울한 사정을

알게되어 신씨를 다시 복위케 합니다.

 

 

[병풍바위 이야기]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인왕산 중턱 치마바위 위에 있는 바위로서

웅장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1939년 인왕산 병풍바위를 찍은 사진에는 '황기 2599년(1939)

9월 16일에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행서체로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란 한자 글씨가 선명합니다.

당시 경성에서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릴 때 기념각자로

새긴 것으로, 매일신보는 9월 17일

'천추에 빛날 각자 기공식'이 열렸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왼편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가

같은 날짜에 천황에 대한 맹세를 작은 글씨로

새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위 글씨를 새긴 사람은 스즈키 긴지로(鈴木 銀次郞)로

금강산 구룡폭 암벽에 해강 김규진의 거대한 19미터 글씨

 '미륵불'을 새긴 조각 기술자였다고 합니다.

 

광복 후 암면을 쪼아 글씨들을 제거한 상태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 흔적이 지금도 역력합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국보 제 216호]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138.2센티, 세로 79.2센티입니다.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렸는데,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배치하였습니다.

 

산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비에 젖은 뒷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를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하였습니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선 영조 27년(1751) 5월 25일, 일주일 가량 비가

온 후그려진 이 그림은 이제까지의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것에 반하여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실경산수화일 뿐만 아니라

그 화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산수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400여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고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얽힌 사연

 

정선은 조선 영조대 최고의 시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는데

사천은 대시인이고 겸재는 그림에 대가였으니,

'좌사천 우겸재'라고 불릴 정도로 60여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시화로 지극한 교류를 지속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교류가 시화첩,

<경교명습첩>으로 결실을 맺게 되며,

 이들간의 끈끈한 유대는 1740년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후에도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기로 약속한 이병연이기에,

이병연이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을 앞두었을 때

정선의 고통도 극에 달했던 모양입니다.

 

며칠 째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갑작스레 갠

초여름 오후 인왕산에 오른 정선은 지기였던

이병연의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를 위해 그린 그림이 바로

 '인왕제색도'라고 합니다.

 

(박경희, '술에 미치고 자연에 취하다' p.27~40 참조, 아트북스,2008)

 

제색(霽 비 갤 제, 色 빛 색)이란 비가 그친 뒤에

생명력이 가득한 자연의 원 모습,

천지창조 시절 그 자체의 모습을 회복한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여인이 목욕하고 나오는 것처럼

아름답고 생명력이 가득한 모습이지요.

 

그림 안에 있는 집은 이병연의 집이라고 하는데,

겸재는 비가 개인 후 인왕산 골짜기에 가득한

왕성한 생명력의 기운으로 친구 이병연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주기를 바라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이 됩니다.

(창원대학교 사학과 도진순 교수님 말씀)

 

인왕산 병풍바위 치마바위 를 등산하시는 분들께서는

즐겁고 유익한 산행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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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정한 호롱불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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